나주최씨(羅州崔氏) 종친(宗親)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주최씨 대동보 증보판 편찬과 인터넷 족보 개통에 협조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족보(族譜)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입니다. 족보(族譜)는 동일 혈족의 혈통을 존중하고, 가통(家統)을 계승하여, 명예로 삼기 위해 제작된 역사서입니다. 특히 인터넷 족보는 우리의 후손들로 하여금 계보에 관심을 두고, 언제 어디서나 본관들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게 함으로써, 나주최씨가 어떻게 해서 유구한 전통을 지닌 가문이 되었는지를 쉽게 알려줍니다.
우리 나주최씨는 진의부위공(進義副尉公)이신 휘(諱) 정원(井元) 할아버지를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선조 중 3대 휘(諱) 부(溥, 1454~1504)의 호(號)는 금남(錦南)이시며, 홍문관(弘文館) 교리 및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을 지내셨습니다. 『동국통감』을 찬수 (撰修)하시고, 『동국여지승람』 개수(改修)에도 동참하시었으며, 명나라 표류기인 『표해록(漂海錄)』을 찬술하시었습니다. 갑자사화(1504, 연산군10년)에 참형되셨으나, 1507(중종 2년)에 신원(伸冤)되시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추증(追贈)되셨습니다.
6세손이신 휘(諱) 번(蕃)은 호(號)가 석정(石亭)이시며, 임진왜란(1592, 선조25년) 때 김천일(金千鎰, 1537~1593), 고경명(髙敬命, 1533~1592), 양산숙(梁山璹, 1561~1593)등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에서 전사(戰死) 하셨습니다.
1605년(선조38)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녹훈(錄勳) 되셨으며,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추증(追贈) 되셨습니다.
아들 셋을 두셨는데, 장자(長子)휘 용해(龍海)와 차자(次子) 휘 두남(斗南)은 탐진(耽津)으로 본(本)을 두셨습니다. 삼자(三子)인 휘(諱) 용운(龍雲) 할아버지는 호(號)가 운남(雲南)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셨습니다. 운남(雲南) 할아버지께서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로 분관(分貫)
하셨으니, 이분이 나주최씨(羅州崔氏)의 중시조(中始祖)이십니다. 청양(靑陽)으로 낙향(落鄕) 하시어 장자(長子) 휘 정순(廷洵)을
두시고, 차자(次子) 휘 논금(論金)은 서산입향조(瑞山入鄕祖)로, 논금 조(祖)의 차자 휘 만흥(萬興)은 보령입향조(保寧入鄕祖)로 뿌리를 내리셨습니다.
나주최씨 종친 여러분!
변화의 물결로 인해 우리의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켜내야 할 가치와 정신은 아직도 우리의 삶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공자는 “옛것의 실마리를 잘 찾아서, 새것을 만들 줄 알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주최씨도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면서, 가문의 역사를 이어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 청년 종원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합니다.
나주최씨의 한 사람으로서 조상을 섬기는 ‘숭조(崇祖)의 정신을 이어간다’라는 자긍심을 갖고 대종회의 사업에 적극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이번 나주최씨 인터넷 족보 편찬에는 오랫동안 우리 나주최씨 대종회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성원을 베풀어 주신 관수(寬洙) 명예회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주최씨 문헌총서”를 발간하시어 정확한 나주최씨 뿌리를 정립(定立) 할 수 있었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다년간 현조선양(顯祖宣揚)에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국경(國慶) 고문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외 종친분들의 아낌없는
후원(後援)으로 오늘의 결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종친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2024년 12월 26일
나주최씨대종회 6대회장 최 문 수 拜
나주최씨(羅州崔氏) 종친(宗親)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주최씨 대동보 증보판 편찬과 인터넷 족보 개통에 협조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족보(族譜)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입니다. 족보(族譜)는 동일 혈족의 혈통을 존중하고, 가통(家統)을 계승하여, 명예로 삼기 위해 제작된 역사서입니다. 특히 인터넷 족보는 우리의 후손들로 하여금 계보에 관심을 두고, 언제 어디서나 본관들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살펴보게 함으로써, 나주최씨가 어떻게 해서 유구한 전통을 지닌 가문이 되었는지를 쉽게 알려줍니다.
우리 나주최씨는 진의부위공(進義副尉公)이신 휘(諱) 정원(井元) 할아버지를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선조 중 3대 휘(諱) 부(溥, 1454~1504)의 호(號)는 금남(錦南)이시며, 홍문관(弘文館) 교리 및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을 지내셨습니다. 『동국통감』을 찬수 (撰修)하시고, 『동국여지승람』 개수(改修)에도 동참하시었으며, 명나라 표류기인 『표해록(漂海錄)』을 찬술하시었습니다. 갑자사화(1504, 연산군10년)에 참형되셨으나, 1507(중종 2년)에 신원(伸冤)되시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추증(追贈)되셨습니다.
6세손이신 휘(諱) 번(蕃)은 호(號)가 석정(石亭)이시며, 임진왜란(1592, 선조25년) 때 김천일(金千鎰, 1537~1593), 고경명(髙敬命, 1533~1592), 양산숙(梁山璹, 1561~1593)등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晉州城)에서 전사(戰死) 하셨습니다.
1605년(선조38)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녹훈(錄勳) 되셨으며,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추증(追贈) 되셨습니다.
아들 셋을 두셨는데, 장자(長子)휘 용해(龍海)와 차자(次子) 휘 두남(斗南)은 탐진(耽津)으로 본(本)을 두셨습니다. 삼자(三子)인 휘(諱) 용운(龍雲) 할아버지는 호(號)가 운남(雲南)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셨습니다. 운남(雲南) 할아버지께서 본관(本貫)을 나주(羅州)로 분관(分貫)
하셨으니, 이분이 나주최씨(羅州崔氏)의 중시조(中始祖)이십니다. 청양(靑陽)으로 낙향(落鄕) 하시어 장자(長子) 휘 정순(廷洵)을
두시고, 차자(次子) 휘 논금(論金)은 서산입향조(瑞山入鄕祖)로, 논금 조(祖)의 차자 휘 만흥(萬興)은 보령입향조(保寧入鄕祖)로 뿌리를 내리셨습니다.
나주최씨 종친 여러분!
변화의 물결로 인해 우리의 세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켜내야 할 가치와 정신은 아직도 우리의 삶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공자는 “옛것의 실마리를 잘 찾아서, 새것을 만들 줄 알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주최씨도 시대의 흐름에 동조하면서, 가문의 역사를 이어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젊은 청년 종원분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합니다.
나주최씨의 한 사람으로서 조상을 섬기는 ‘숭조(崇祖)의 정신을 이어간다’라는 자긍심을 갖고 대종회의 사업에 적극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이번 나주최씨 인터넷 족보 편찬에는 오랫동안 우리 나주최씨 대종회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성원을 베풀어 주신 관수(寬洙) 명예회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주최씨 문헌총서”를 발간하시어 정확한 나주최씨 뿌리를 정립(定立) 할 수 있었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다년간 현조선양(顯祖宣揚)에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 국경(國慶) 고문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외 종친분들의 아낌없는
후원(後援)으로 오늘의 결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종친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2024년 12월 26일
나주최씨대종회 6대회장 최 문 수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