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최씨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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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01.png나주최씨 조형물 및 유래문

 

조형물 번호 066 준공 1997년 11월 01일

m012.png 작  품  명 : 인류의 평화

m012.png 조  각  가 : 박기환

m012.png 작품설명 : 좌대 위는 배를 상징하며 배위 조형물은 우주를 향하여 전진과 인류의 평화와 옛것과 윗 사람의 공경으로 한데 뭉쳐 종친의 발전을 표현함.

m012.png 유  래 : 나주(羅州)로 관(貫)한 최씨(崔氏)는 탐진최씨(耽津崔氏) 시조(始祖) 장경공(莊景公)(諱) 사전(思全)의 후예(後裔)인 진의부위공(進義副尉公)(諱) 정원(井元)을 시조(始祖)로 삼고 부위공(副尉公)의 일남(一男) 진사공(進士公)(諱)(澤)의 오세손(五世孫)으로 증형조참판공(贈刑曺參判公)인 휘(諱)(蕃)의 삼남(三男)(中) 장차형제(長次兄弟)는 탐진(耽津)으로 계대(系代)하고 있으나 삼남(三男)인 군자감정공(軍資監正公)(諱) 용운(龍雲)을 기일세(起一世)하여 나주(羅州)로 분관이적(分貫移籍)하였다.

 

시조(始祖)인 부위공(副尉公)의 손자(孫子)인 증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贈通政大夫 承政院都承旨) 금남공(錦南公) (諱) (溥)께서 나주출생(羅州出生)으로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 등문과(登文科)하여 호당(湖堂)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編纂)에 참관(參管)하는 등 문명(文名)을 떨치었으므로 그의 후손(後孫)들이금남공(錦南公)의 전출생세거지(前出生世居地)인 나주(羅州)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면면(綿綿)이 이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충남(忠南) 청양(靑陽)과 서산(瑞山), 보령(保寧)등 각지(各地)에서 산거(散居)하고 있으니 무려(無慮) 수천백인(數千百人) 이다.

 

다만 금남공(錦南公)은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서 제주(濟州)에 가셨다가 부친상(父親喪)의 기별(奇別)을 받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風浪)을 만나 명(明)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표착(漂着)하여 북경(北京)을 거쳐 반년(半年)만에 본국(本國)에 돌아와서 어명(御命)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지었으니 이는 세계(世界)적으로 최초(最初) 있는 일로써 그의 해박(該博)한 문성(文聲)을 천하(天下)에 떨치셨다. 이는 오국(吾國)에 자랑이며 오문(吾門)에 큰 광영(光榮)이므로 이에 조각상(彫刻像)을 세워 기리는 것이다.

 

 

m01.png나주최씨 조형물 및 유래문

 

조형물 번호 066 준공 1997년 11월 01일

m012.png 작품명 : 인류의 평화

m012.png 조각가 : 박기환

m012.png 작품설명 : 좌대 위는 배를 상징하며 배위 조형물은 우주를 향하여 전진과 인류의 평화와 옛것과 윗 사람의 공경으로 한데 뭉쳐 종친의 발전을 표현함.

m012.png 유래 : 나주(羅州)로 관(貫)한 최씨(崔氏)는 탐진최씨(耽津崔氏) 시조(始祖) 장경공(莊景公)(諱) 사전(思全)의 후예(後裔)인 진의부위공(進義副尉公)(諱) 정원(井元)을 시조(始祖)로 삼고 부위공(副尉公)의 일남(一男) 진사공(進士公)(諱)(澤)의 오세손(五世孫)으로 증형조참판공(贈刑曺參判公)인 휘(諱)(蕃)의 삼남(三男)(中) 장차형제(長次兄弟)는 탐진(耽津)으로 계대(系代)하고 있으나 삼남(三男)인 군자감정공(軍資監正公)(諱) 용운(龍雲)을 기일세(起一世)하여 나주(羅州)로 분관이적(分貫移籍)하였다.

 

시조(始祖)인 부위공(副尉公)의 손자(孫子)인 증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贈通政大夫 承政院都承旨) 금남공(錦南公) (諱) (溥)께서 나주출생(羅州出生)으로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 등문과(登文科)하여 호당(湖堂)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編纂)에 참관(參管)하는 등 문명(文名)을 떨치었으므로 그의 후손(後孫)들이금남공(錦南公)의 전출생세거지(前出生世居地)인 나주(羅州)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면면(綿綿)이 이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충남(忠南) 청양(靑陽)과 서산(瑞山), 보령(保寧)등 각지(各地)에서 산거(散居)하고 있으니 무려(無慮) 수천백인(數千百人) 이다.

 

다만 금남공(錦南公)은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서 제주(濟州)에 가셨다가 부친상(父親喪)의 기별(奇別)을 받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風浪)을 만나 명(明)나라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표착(漂着)하여 북경(北京)을 거쳐 반년(半年)만에 본국(本國)에 돌아와서 어명(御命)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지었으니 이는 세계(世界)적으로 최초(最初) 있는 일로써 그의 해박(該博)한 문성(文聲)을 천하(天下)에 떨치셨다. 이는 오국(吾國)에 자랑이며 오문(吾門)에 큰 광영(光榮)이므로 이에 조각상(彫刻像)을 세워 기리는 것이다.